본문 바로가기

KTN 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겨울나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조회 11회 작성일 26-01-23 09:12

본문

박인애 (시인, 수필가)
박인애 (시인, 수필가)

호수로 가는 길가의 도토리 나무엔 빈 둥지, 빈 도토리 깎지, 빈 가지… 온통 빈 것뿐이다. 


  나무 아래 쌓인 도토리 열매마다 도토리거위벌레가 뚫어 놓은 구멍들이 확연히 보인다. 어미는 그 속에 알을 낳은 후 가지를 입으로 잘라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열매 속에서 부화한 새끼가 도토리 양분을 먹고 땅속에서 겨울을 날 수 있게 하는 지극한 모성이다. 나뭇잎째 가지를 자르는 기술은 어디서 배웠을까. 미물들의 생존법이 경이롭다.  


  나무도 휴지기가 있어야 또 다른 새해를 맞을 수 있다. 죽은 듯 보이는 나무가 거북이 등 같은 거칠거칠한 수피 속에서 꼼지락꼼지락 새봄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특하고 장하다. 매년 같아 보이지만, 나름대로 오래된 외투를 벗고 새로운 옷을 입고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 거다. 그래서 기대된다. 


  겨우살이가 제철을 만났다. 올해도 어김없이 남의 집에 버젓이 살림을 차리더니, 어느새 영롱한 열매로 겨울새를 유혹한다. 겨울 나목에 그토록 싱그러운 연둣빛이라니, 축축 늘어진 모양새가 부잣집 샹들리에 같다. 겨우살이는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혼자서는 설 수 없어서 남의 가지에 몸을 얹고 겨울을 난다. 그 사실을 안 후부터 겨울이면 존재감을 드러내는 겨우살이가 반갑기도 하고, 남의 집에 얹혀사는 심정이 얼마나 불안할까 싶어 안쓰럽기도 하다. 살기 위해 어딘 가에 기대야 하는 신세가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이민자로 살아오며 나 역시 수많은 겨울을 건넜다. 겉보기엔 잘 사는 듯 보였겠지만, 어딘 가에 기대야 서 있는 게 가능했다. 언어에, 제도에, 누군가의 친절에, 가난한 문학에. 나름 낯선 땅에 뿌리를 내렸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실은 나목에 얹힌 겨우살이처럼 위태롭게 견디며 산 세월이 더 길었던 거다.


  겨우살이는 겨울에 열매를 맺는다. 새를 부르기 위해서다. 봄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살아야 할 이유를 계절 뒤로 미루지 않는다는 점이 부럽다. 나는 종종 ‘조금만 더 지나면’, ‘이 시기만 잘 넘기면’ 하며 삶을 유예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겨우살이는 그런 핑계를 모르는 존재다. 겨우살이를 기생이라 부른다. 정확하게는 남의 나무줄기에서 수액을 빨아먹고 사는 반기생 식물이다. 기대어 산다는 것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혼자 서진 못하지만, 살겠다는 의지는 분명하니까. 문득 기생이라 말하는 게 조심스러워졌다. 어쩌다 보니 나도 기대야 사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우뚝 서야만 당당한 거라고 말했던 건, 하루 앞도 모르는 자의 오만이었다. 


  새해가 되어도 가라앉았던 기분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다 말겠거니 했는데, 꽤 오래갔다. 건강상의 이유든 다른 이유든, 목표했던 바를 이루지 못한 데에 대한 자책이 컸다. 결실의 계절에 거둘 것 없는 농부의 마음처럼 허무하고 실망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꼬리를 물고 거슬러 올라가 보니 시작은 SNS였다. 지인의 대부분이 작가다 보니 상 받고, 출간하고, 출판기념회하고, 우수도서에 선정되는 등 자신의 성과를 알리는 게시물이 연말에 오르내렸다. 시간이 갈수록 나만 뒤처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 감정이 나를 주저앉혔다. 

  모든 나무가 잎을 버리고 침묵할 때, 겨우살이는 자신을 드러낸다. 숨기지도, 변명하지도 않는다. 그 솔직하고 당당한 초록이 싫지 않다. 그렇게라도 살아야 하는 삶을 응원해 주고 싶어졌다. 

  모처럼 하늘이 쨍하다. 나목은 말이 없고, 그 위에 얹힌 겨우살이 열매는 눈부시다. 그 어느 것도 내 잣대로 재거나 판단하지 말아야지. 그 자체로 존중하고 인정해야지. 모두 그렇게 힘든 시기를 근근이 버티며 건너가고 있으니까. 


  우리 집 무궁화나무가 곱고 여린 잎새를 피워냈다. 조금만 따뜻하면 봄인 줄 알고 철없이 얼굴을 내민다. 주말에 기온이 떨어져서 눈이 올지 모른다는데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오늘 피고 내일 얼어 죽더라도 밀어붙이는 그 깡이 부럽다. 


  마음을 다잡았다. 닫혔던 마음에 손을 내밀었다. 조금 늦게 가도 괜찮으니 힘내라고. 여기는 끝이 아니라 다시 서는 출발선이라고. 아무쪼록 새해에는 얼어붙은 경기가 풀리고, 구멍 난 주머니가 메워지고, 마른 땅에 풀이 돋고, 급속 냉동된 관계가 완화되어서 도토리나무에 새순이 오를 때 즈음엔 다 편해졌으면 좋겠다. 백마든, 청마든, 적마든, 아니 조랑말이어도 좋으니, 목적지를 향해 달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방향을 정하니 마음은 이미 봄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 RSS
KTN 칼럼 목록
    공학박사박우람서울대 기계공학 학사, 석사미국 Johns Hopkins 대학 기계공학 박사UT Dallas 기계공학과 교수재미한인과학기술다 협회 북텍사스 지부장물리학은 우주의 물질세계가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하는지 설명해준다. 물리학 이전의 인류는 주술과 미신에 기댈 수밖…
    리빙 2026-01-23 
    호수로 가는 길가의 도토리 나무엔 빈 둥지, 빈 도토리 깎지, 빈 가지… 온통 빈 것뿐이다. 나무 아래 쌓인 도토리 열매마다 도토리거위벌레가 뚫어 놓은 구멍들이 확연히 보인다. 어미는 그 속에 알을 낳은 후 가지를 입으로 잘라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열매 속에서 부화한 …
    문학 2026-01-23 
    서윤교CPA미국공인회계사 / 텍사스주 공인 / 한인 비즈니스 및 해외소득 전문 세무컨설팅이메일:[email protected]년을 마무리하며 반드시 알아야 할 개인소득세 준비사항과 주요 변경 내용미국 국세청(IRS)은 2026년 1월 26일부터 2025년도 개인소…
    회계 2026-01-23 
    ‘러시모어(Rushmore)’와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의 숨길 수 없는 역사와 이어지는 수많은 갈등, 오랜 세월의 시간과 고통 속에서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해야할 수많은 고민을 안고 있는 곳, 이러한 고민이 있기에 미국의 역사는 계속 새롭게 만들어지고 …
    여행 2026-01-23 
    보험회사와 보험에이전트 자동차나 주택보험 외에도 보험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며, 보험회사가 없으면 국가 경제가 마비될 정도로 그 영향력이 크다.보험회사는 은행 및 증권회사 등과 함께 미국 경제를 움직이는 …
    리빙 2026-01-23 
    조나단김(Johnathan Kim)-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 졸업- 現 핀테크 기업 실리콘밸리 전략운영 이사미국에서 명문대학이라 하면 하버드, 예일, 스탠퍼드 같은 이름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입시 과정과 거리가 있는 사람들조차 이들 학교의 위상을 알고 있을 …
    교육 2026-01-23 
    내 마음에 그려놓은 마음이 고운 사람들이 있어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의 아침은 새벽녘 투명한 물방울이 대지를 적시고 그 위를 보석처럼 찬란하게 비치는 태양과 같이 찬란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곳을 살아가던 원주민들이 만들어 놓았던 수많은 문명을 잊어버…
    여행 2026-01-17 
    박운서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Email :[email protected] Old Denton Rd. #508Carrollton, TX 75007새해 경제지표를 대변하는 다우를 포함한 3대 주가지수가 1…
    회계 2026-01-17 
    엑셀 카이로프로틱김창훈원장Dr. Chang H. KimChiropractor | Excel Chiropracticphone: 469-248-0012email:[email protected] MacArthur Blvd suite 103, Lewis…
    리빙 2026-01-17 
    고대진작가◈ 제주 출신◈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에세이집 <…
    문학 2026-01-17 
    미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 주에는 대통령의 도시로 알려진 아주 작고 조용한 마을, 그렇지만 한적한 이곳에선 두번째로 큰 도시라고 하기엔 너무나 적은 인구 7만5천명이 거주하는 래피드 시티(Rapid City)가 있습니다. 가까운 거리…
    여행 2026-01-10 
    크리스틴손,의료인 양성 직업학교,DMSCare Training Center 원장(www.dmscaretraining.com/ 469-605-6035)Medical Assistant(MA)가 열어주는 새로운 길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한 번쯤 “병원이나 클리닉에서 일해보고…
    리빙 2026-01-10 
    직장 생활을 하는 남편은 늘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신년 초까지 이 주간의 휴가를 잡아놓는다. 마치 알사탕을 아껴 먹으려는 아이처럼, 다른 달에 휴가를 쓰자고 하면,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는 것처럼 연말은 꼭 비워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긴 해피 할리데이란 인사말처럼 이 기…
    문학 2026-01-10 
    서윤교CPA미국공인회계사 / 텍사스주 공인 / 한인 비즈니스 및 해외소득 전문 세무컨설팅이메일:[email protected]년도 세금보고시즌이 지난 6일 IRS의 발표로 시작됐다. 한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S Corporation을 포함한 모든 비즈네스 세금보고는…
    회계 2026-01-10 
    자동차 보험미국에서 자동차는 필수품이지만 유지비용이 만만치 않다. 비용중에는 자동차 관리,수리비용과 보험비용이 가장 큰 비용이다. 그래서 보험료에 관련해서 자동차보험 가입자가 자주 질문하는 사항들을 몇가지 간추려 보았다.가입자의 주거지역당신이 어디에 사는가? 더 자세히…
    리빙 2026-01-10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