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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칼럼

[고대진] 아름다운 첫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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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문학 댓글 0건 조회 53회 작성일 25-05-03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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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진 작가

◈ 제주 출신

◈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 에세이집 <순대와 생맥주>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라고 시작하는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읽는 동안 마음에 녹지 않는 성근 눈이 내리게 하다 나중에는 푹푹 내리는 눈 속에 쌓여 몸을 얼게 만들기도 한다. 첫 문장에서부터 독자를 사로잡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나는 소설을 고를 때 처음 몇 쪽을 보고 나서 앞으로 계속 읽을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몇 쪽을 읽을 때까지 독자를 못 잡는 소설이라면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평론가의 평이 아주 좋은 소설이라면 억지로 참고 20쪽까지는 읽어주지만 더는 아니다. 하지만 어떤 소설은 첫 문장부터 나를 사로잡게 만든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그랬다. 그런 소설은 독자를 결코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해도 첫 문장을 기억하며 감동이 오래 가슴에 남게 한다. 


이런 소설들이 몇 더 있다. 내가 오래 기억하는 인상 깊은 소설의 첫 문장은 이상의 ‘날개’에서 나오는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이다. 중학생 때 이 문장에 반해 소설을 읽었고 이상이란 작가의 작품들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마치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된 듯하였는데 천재인척 하기에는 난 너무나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그 문장을 생각하며 천재가 못된 박제만을 기억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노벨상을 받았다. 1968년인 것 같다. 그 때 찾아 읽은 그의 대표작 ‘설국雪国’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라고 시작한다. “The train came out of the long tunnel into the snow country.”라는 영문 번역이 돋보였던 문장이다. 이어지는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는 문장은 어린 나에게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정경. 눈처럼 차갑고 깨끗한 작품의 전반적인 느낌과 분위기. 나중에 일본어를 공부하면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과 함께 원어로 열심히 공부했던 소설이었다. 


알베르트 카뮈의 ‘이방인’의 시작도 아주 인상 깊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그게 어제였나. 잘 모르겠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는 세상일에 별 관심도 없고 어머니의 죽음마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이러한 뫼르소의 무감수성은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하는데 대학생 때 나로서는 어떻게 서양사람들은 어머니의 죽음에도 이렇게 차갑게 반응할 수 있을까 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불쑥, 말이 조금 섞이고 나도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법정에서는 웃음이 일었다.”라며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재판정에서 진술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황당해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읽은 소설 중 가장 인상적인 시작 문장이 있는 소설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이다. 영어 공부도 할 겸 시작한 책이었는데 그 첫 쪽이 나를 사로잡고 말았다. 프랑스 혁명 당시의 격동적 사회를 이렇게 잘 표현할 수가 있나 해서. "It was the best of times, it was the worst of times,....(그때는 최고의 시절이었고, 그때는 최악의 시절이었다,…)”라고 긴 첫 문장이 시작된다. 프랑스 혁명 시대를 둘러싼 시대의 모순을 강조하면서 대비되는 문장은 계속된다. “그때는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무엇이든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 쪽으로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이렇게 인상 깊이 쓸 수 있는 작가를 존경하면서 그의 첫 문장이 우리가 처한 현실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며 그의 소설들을 섭렵했다. 


<허만 멜빌>의 소설 ‘모비 딕 Moby-Dic’은 내가 시에틀에 있는 워싱턴 대학에서 북극고래 (bowhead whale)의 인구조사라는 연구 과제를 받아 일할 때 읽은 책이다. 학부 학생 때 숙제로 읽기 시작한 적이 있었는데 너무 지루하고 길어서 중간에 그만두고 말았던 책인데 헌책방에서 50센트를 주고 사서 줄을 치면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Call me Ishmael"이란 짧고 간단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내 이름은 이슈마엘이다’ 아니면 ‘날 이 슈마엘 이라고 불러 다오’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소설은 짧지도 않고 간단하지도 않아서 힘들게 읽었던 것 같다. 고래에 관하여 연구하던 중이라 많은 용어를 익히느라 참고 읽은 것 같다. 학교 조교실을 같이 쓰던 미국 친구와 “왜 이름을 이슈마엘로 정했을까? 톰이나 존 같은 좋은 이름도 있었을 텐데….”라며 웃었던 적이 있다. 유명한 커피집 ‘스타벅스’의 이름도 <모비 딕>에서 나온다. 그 소설을 너무 좋아했던 그 회사 사장이 소설 속의 인물 ‘스타벅’이란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하니 그 사람도 나같이 첫 문장 “Call me Ishmael”에 반했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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