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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칼럼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달라스카의 백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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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문학 댓글 0건 조회 9회 작성일 26-01-30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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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 시인 / 수필가
김미희 시인 / 수필가

금요일부터 달라스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함박눈은 아니었다. 싸라기눈이었다. 하늘에서 쏟아진다기보다 가만히 흘러내리는 눈. 알갱이가 작고 가벼워 보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외투 깃을 세운 채 차 문을 닫으며 손바닥에 떨어진 눈을 털어냈는데, 그 눈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을 속이는 눈이었다.


  나무 위에서 먼저 소리가 났다. 싸라기눈이 잎에 닿을 때마다 싸르륵, 싸르륵, 아주 낮고 마른 소리가 났다. 비도 바람도 아닌, 겨울이 연습 삼아 내는 첫 발음 같았다. 눈은 흩날리지 않았고, 땅을 향해 곧장 내려앉았다. 그날의 달라스는 눈이 ‘오는’ 도시라기 보다, 눈이 ‘머무는’ 도시에 가까웠다.


  바람이 없었다. 달라스의 겨울 폭풍 치고는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눈은 날리지 않았고, 쓸리지도 않았다. 잔디 위에, 자동차 지붕 위에, 보도블록의 틈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밤이 되자 눈은 달빛을 받아 반사하기 시작했다. 가로등보다 먼저 눈이 빛났고, 골목보다 먼저 마당이 환해졌다. 어둠이 와야 할 시간에 어둠이 자리를 잡지 못했다. 백야白夜였다.


  달라스에서 38년을 살았지만 이런 밤은 처음이었다. 매년 눈은 보았어도, 눈이 밤을 밝힌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보통 이곳의 겨울은 소란스럽다. 바람이 먼저 오고, 경고가 먼저 울리고, 덩달아 사람들은 말도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데 이번 겨울은 달랐다. 눈은 싸르륵 거리는 소리만 남긴 채 쌓였고, 도시는 조용히 밝아졌다.


  DFW 지역에는 오래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는 날씨의 지혜가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농담처럼 ‘스톡 야드 날씨’라고 부른다. 공식 예보보다 몸이 먼저 아는 날씨, 지도보다 오래된 감각이다. 소가 먼저 알고, 말이 먼저 피하고, 사람은 나중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날씨. 그 감각으로 보자면, 이때쯤은 한국의 절기로 ‘대한’쯤에 해당한다. 달력보다 늦게, 그러나 분명하게 오는 추위의 문턱이다.


  그 문턱을 넘으면 이 지역은 본격적으로 추워진다. 낮의 온도보다 밤의 체감이 먼저 내려앉는다. 바람이 없을수록 오히려 더 춥다. 뼛속으로 파고드는 냉기가 아니라, 표면에 남아 있는 차가움. 이번 겨울 폭풍의 성격도 그러했다. 바람이 없었기에 눈은 흩어지지 않았고, 흩어지지 않았기에 밤새 남아 백야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 밤의 달라스를 ‘달라스카Dallaska’라고 불렀다. 달라스가 알라스카처럼 추워졌다고 붙인 별명이었다. 농담처럼 부른 이름이었지만, 그날 밤만큼은 과장이 아니었다. 남부의 도시가 잠시 북쪽의 얼굴을 빌려 쓴 밤이었다. 그 밤, 창밖을 몇 번이나 내다보았다. 아니 들여다보았다. 달라스의 밤은 원래 검은색보다 갈색에 가깝다. 먼지와 불빛이 섞인 색. 그런데 그날 밤은 온통 흰색이었다. 싸라기눈이 쌓인 잔디와 차 지붕, 나뭇가지 위의 얇은 흰 선들이 도시의 윤곽을 새로 그려 놓았다. 익숙한 풍경이 낯설어졌고, 조용하고 낯선 풍경이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눈은 이 도시에 손님이다. 늘 오지 않기에 그러나 한 번은 꼭 다녀가는 손님이다. 올 때마다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만든다. 모두가 말수를 줄이고, 속도를 낮춘다. 마트의 통로에서는 모르는 사람끼리도 눈을 마주치며 웃는다. 마치 즐거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처럼 혹은 반가운 손님을 기다리는 것처럼 들떠있다. 달라스 사람들은 눈을 다루는 법은 서툴지만, 맞이하는 태도는 의외로 공손하다. 


아이들은 다르다. 싸라기눈이 쌓인 마당에서 텍사스식 눈사람을 만들다. 크지 않고, 오래 남지 않을 것을 알기에 더 열심이다. 또한, 플라스틱 용기들을 이용해 눈 썰매를 타기도 한다. 장갑이 없어도 괜찮고, 코가 빨개져도 상관없다. 이 도시에서 눈은 추억이 되기 전에 기록이 된다.


  밤이 깊어도 밝은 마당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곳에 찾아온 손님은 늘 조용하다고. 소란을 피우지 않고, 오래 머물지도 않으며, 다만 왔다는 사실만 남기고 떠난다고. 이번 눈도 그럴 것이다. 달라스를 바꾸려 하지 않았고, 자신을 과시하지도 않았다. 다만 하룻밤, 싸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 도시는 다른 시간을 선물받았다.


  해가 지지 않는 밤, 백야는 결국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밤을 본 사람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60년을 살았어도 처음 보는 풍경은 있다. 도시도 나이를 먹지만, 가끔은 새 얼굴을 보여준다. 그날 밤, Dallaska는 낯설고도 다정한 얼굴로 나를 불러 세웠다.


  눈은 곧 녹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밝음은, 그 조용한 추위는 오래 남아 이 도시의 겨울을 기억하게 할 것이다. 손님은 떠나고, 온기는 남을 것이다. 그래서 겨울은, 가끔 이렇게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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