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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데스크칼럼

[데스크 칼럼] 올해의 단어를 통해 바라본 우리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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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KNET
댓글 0건 조회 14회 작성일 25-12-20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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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편집국장 유광진
KTN 편집국장 유광진

“SNS에 갇히고 길들여져 간 2025년 “


2025년이 끝자락으로 향하고 있다. 한 해를 돌아보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사건의 목록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해를 관통한 언어를 살펴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언어는 사회가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올해와 작년, 두 해에 걸쳐 사전이 선택한 단어들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경고문에 가깝다.


옥스퍼드는 작년에 뇌 썩음(brain rot)을, 올해는 분노 미끼(rage bait)를 선택했다. 케임브리지는 패러소셜(parasocial)을 2025년 올해의 단어로 제시했다. 세 단어는 서로 다른 현상을 설명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흐름 위에 놓여 있다. 사고가 약해지고, 감정이 조작되며, 관계가 왜곡되는 사회. 2025년은 그 흐름이 명확한 형태를 띠며 굳어버린 해였다.


◈사고가 약해진 사회


뇌 썩음이라는 단어는 불쾌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정확하게 현실을 나타내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이 단어가 지적하는 것은 개인의 게으름이나 무능이 아니다. 생각하지 않는 환경이 사고 자체를 약화시키는 구조다. 짧은 영상, 빠른 전환, 즉각적인 보상. 생각하지 않아도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가 일상이 되면서 깊은 사고는 선택이 아니라 부담이 됐다.


2025년의 정보 환경은 속도와 단순함을 극단적으로 요구했다. 이제는 기사를 쓰면서도 내용 전달도 중요하지만 기사의 길이도 신경써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긴 문장은 읽히지 않았고, 맥락은 생략됐다. 질문은 불편한 것이 되었고, 복잡한 설명은 도리어 변명처럼 들리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점점 ‘이해’보다 ‘반응’에 익숙해졌다. 무엇이 사실인지보다 무엇이 더 자극적인지가 중요해졌다. 이 상태가 바로 뇌 썩음이다. 머리가 비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머리를 쓰지 않도록 길들여진 상태다. 


◈분노가 가장 효율적인 언어가 된 해


사고가 약해진 사회에서 가장 빠르게 작동하는 감정은 분노다. 분노는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분노는 설명보다 빠르고, 논리보다 강하다. 그래서 분노 미끼는 2025년의 가장 강력한 콘텐츠 전략이 됐고 옥스퍼드에서는 이 단어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을 하게된 것이다.


분노 미끼는 단순한 선정적 기사나 자극적 제목을 넘어선다. 그것은 구조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적대 구도로 나누고, 특정 집단이나 인물을 악역으로 설정한다. 


2025년의 뉴스 환경은 이 구조에 깊이 잠식됐다. 정치, 경제, 젠더, 이민, 종교까지 분노 미끼의 대상이 되지 않은 영역을 찾기 어려웠다. 클릭 수와 공유 수가 성과의 기준이 되면서, 분노는 가장 효율적인 언어가 됐다. 화내지 않는 사람은 무관심한 사람으로, 침착한 사람은 방관자로 취급됐다.


문제는 분노가 사고를 더 약화시킨다는 점이다. 분노 상태에서는 맥락을 보지 않는다. 반론을 듣지 않는다. 확인하지 않는다. 분노 미끼는 뇌 썩음을 가속화하고, 뇌 썩음은 다시 분노 미끼의 토양이 된다. 2025년은 이 악순환이 일상화된 해였다.


◈관계가 이미지로 대체된 해


사고는 약해지고, 감정은 과잉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점 현실의 관계를 버거워하게 된다. 현실속 인간관계는 복잡하고,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하며, 상처의 가능성을 동반한다. 


반면 디지털 공간의 관계는 일방적이고 안전하다. 응답하지 않아도 되고, 거절당할 위험도 없다. 패러소셜(parasocial)은 바로 이 지점을 설명한다. 실제로는 상호작용이 없는 대상에게 관계가 있다고 느끼는 상태. 연예인, 인플루언서, 유튜버, 심지어 가상의 캐릭터까지. 2025년의 많은 사람들은 실제 사람보다 화면 속 인물과 더 친밀하다고 느꼈다.


이 현상은 “연예인을 좋아하는 문화가 커졌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이 관계를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예전의 관계는 서로 말을 주고받고,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었다. 기쁘게도 하고, 실망도 하고, 때로는 상처도 주는 대신 그만큼 깊어질 수 있는 관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상대방과 부딪히지 않아도 된다. 내가 원할 때 보고, 피곤하면 끄면 되는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거절당할 걱정도 없고, 책임질 필요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과 관계를 맺기보다 그저 감정을 소비하고, 외롭지 않다고 느끼지만 사실 외로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눌러 놓고 관리하는 상태에 가깝다.


깊이 연결되는 관계 대신 덜 아프고, 덜 복잡하고, 덜 위험한 유대가 선택되고 있다. 안전하지만, 그만큼 얕은 관계이고 이것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관계의 모습이다.


2025년은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법을 잊어버린 해라기보다, 관계를 피하는 법을 배운 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6년을 바라보며


2026년을 앞두고 우리가 던질 질문은 사실 하나 뿐이다. 


앞으로의 시간도 분노에 휩쓸려 흘러갈 것인가, 아니면 조금 다르게 살아볼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올해의 단어를 뽑아내는 사전제작사들은 미래를 예측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단어로 표시해 줄 뿐이다. 


뇌 썩음, 분노 미끼, 패러소셜이라는 단어들이 이미 선택됐다는 것은 아직 길을 바꿀 수 있는 지점에 우리가 서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2025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숨 가쁜 해였다.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다음 자극, 다음 뉴스, 다음 분노로 밀려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의 단어를 선정하고, 그것을 되짚어보는 것은 결코 우리가 무작정 떠밀려 가고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신호다.


2026년 한 해의 방향은 거대한 선택에서 정해지지 않는다. 화가 난다는 이유로 누른 한 번의 클릭, 굳이 반응하지 않고 넘긴 한 번의 침묵, 그 작은 선택들이 쌓여 다음 해의 분위기를 만든다.


2026년은 주어지는 해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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