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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N 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폭풍 뒤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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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TN
문학 댓글 0건 조회 2,605회 작성일 24-05-25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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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애 (시인, 수필가)
박인애 (시인, 수필가)

박인애

시인, 수필가

 

깨진 일상에 시동을 거는 일이 쉽지 않다. 시차 적응은 했는데 일손이 잡히지 않는다. 한 번 발동이 걸리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3주가 지나도록 해결이 안 돼서 헤매는 중이다. 해가 갈수록 걸리는 속도가 느리다. 빠릿빠릿하게 일을 처리해야 마음이 편한데 몸이 마음의 속도를 따르지 못한다. 한 번에 한 가지도 해결 못 하면서 어떻게 두세 가지를 커버하며 살았는지 모르겠다. 닥치면 또 하게 되겠지만, 이젠 정해진 일상에 뭔가 훅 치고 들어오거나 바뀌는 게 두렵다. 그런 나이가 되어가는 모양이다. 
남이 잘 때 일하고, 낮에 쪽잠을 잤다. 밤에 집중이 잘 되니 습관이 그렇게 들어버렸다. 조용해야 글이 써지고 생각이 모아졌다. 숙면이 중요하다는 의사의 충고를 잔소리로 여기며 오랜 세월 거꾸로 살았다. 그렇게 해서 작가로의 삶이 업그레이드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그런 것 같진 않고, 약병만 늘었다. 그 덕에 한국에 가면 시차 적응이 필요 없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거주민처럼 돌아다닌다. 한국에서 보낸 한 달 동안 많은 일을 했고, 많은 곳에 다녔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하루에 만 보 가까이 걸으니 저녁이면 시체처럼 쓰러져 잤다. 뭔가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사는 것 같았다.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새라소타에 갔다. 바닷바람 때문에 습하고 더웠다. 딸은 졸업 준비뿐 아니라 기숙사까지 비워야 해서 일이 많았다. 혼자 척척 해내는 모습이 대견했다. 코로나가 창궐했던 시기에 입학식도 못 하고 두 학기나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할 때는 미대 수업을 이렇게 해도 되나 싶어 걱정했는데, 어느새 졸업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졸업식 프로그램을 보며 입학생은 많아도 졸업생은 적은 게 미국대학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문학과 미술은 공통점이 많다. 그런 면에서 딸과 대화가 통한다. 창작의 고통을 이해하니 서로에게 위로와 도움이 되기도 한다. 
무리했는지 일상이 깨졌다. 책상에 앉으면 병든 닭처럼 존다. 진도를 못 빼니 신경이 쓰이지만 넘어진 김에 쉬어 갈 생각이다. 수강생들도 그러려니 하는 것 같다. 내 딸도 그랬으면 좋겠다. 남들은 뭔가 바삐 움직이는데 자기만 멈춰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겠지만, 쉬면서 여유를 찾았으면 좋겠다. 인생은 장거리 경주다. 거기엔 수많은 변수가 있다. 조금 먼저 출발했다고 일등을 하는 것도 아니고, 조금 늦게 출발했다고 꼴찌를 하는 것도 아니니 충분히 생각하고 출발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시댁이 있는 휴스턴에 토네이도가 발생해 인명 피해가 생기고 백만 가구에 전기 공급이 끊겼다가 반쯤 복구된 상태다. 뉴스에서 부러진 나무와 망가진 집, 엉망이 된 거리를 보았다. 송전탑이 종이처럼 구겨진 채 쓰러졌고 학교는 휴교령이 내렸다. 시댁도 전기가 나가서 어머니는 아주버님 집으로 몸을 피했다. 부러진 나무와 잔해물을 치우고, 상한 음식을 버리고 냉장고 청소하느라 다음 날 오겠다던 남편은 사흘째 그곳에 머물고 있다. 
언젠가부터 그만하기 다행이라는 말을 하는 게 조심스럽다. 더 큰 화를 입지 않은 게 다행인 건 맞지만, 위로로 와닿지 않았다. 크든 작든 화를 당했는데 다행일 일이 뭘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느꼈을 두려움과 피해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뉴스에서 물에 반쯤 잠긴 차를 볼 때마다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꿈을 꾸고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이민 초기 휴스턴에서 살 때였다. 허리케인으로 도로가 순식간에 물에 잠겼다. 페달을 계속 밟으며 열쇠를 돌리다 보면 시동이 걸리고, 신호등 앞에 잠시 서면 시동이 꺼지는 위험한 중고차를 타고 직장에 다녔다. 
하루는 일하고 있는데 라디오 로컬 뉴스에서 우리 지역을 거론하며 대피하라고 했다. 이기적인 주인이 악착같이 일을 시켜 정시에 퇴근했다. 경사진 길을 내려와 도로에 들어선 순간 차가 물속으로 반쯤 잠겼다. 하늘은 새카맣고 폭우와 강풍은 불고, 물은 불어나는데 차 안에는 창문을 깰 연장 하나 없고, 창밖엔 아무도 없었다. 물이 출렁일 때마다 본네트에서 하얀 김이 올라왔다. 발을 떼면 시동이 꺼질까 봐 온 힘을 다해 누른 채 10마일로 운전했다. 큰 도로까지 가는데 억겁의 세월이 흐른 것 같았다. 그날 시댁 어른들은 사색이 되어 돌아온 나를 보며 그만하기 다행이라고 했다.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진심이 와닿지 않았다. 며느리가 아니라 딸이었다면 누구를 동원해서 든 찾으러 오지 않았을까 싶었다. 차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아니까. 돌아보면 주저앉은 아메리칸 드림처럼 암울했던 시기였다.  
오늘 신경림 시인이 돌아가셨다. 나도 언젠가는 떠날 것이다. 나도 좋은 시를 남기고 갈 수 있을까. 누구에게도 피해 주지 않고 살다가 잠자듯 떠났으면 좋겠다. 지금도 누군가는 무너진 인생에 시동을 걸고 있을 것이다. 잘 걸려서 수해 지역이 복구되고, 상처가 치유되고, 원하는 직장에 취직하고, 모두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가 힘차게 달릴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세찬 폭풍도 멎는 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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